산, 들, 바다가 있는 땅엔 초록이 있고 파랑이 있다. 땅 위로 내려 앉는 붉은 색의 하늘엔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묻어 있다. 긴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한적한 해안도시 부안. 자연의 생생한 정취가 고스란히 담긴 이 지역엔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며 만든 다채로운 색이 있다.
왼쪽부터 부안 모안 해수욕장, 변산 해변, 줄포만 노을빛 정원 ⓒ부안군문화관광
그리고, 부안의 색으로 새로운 삶의 색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땀과 정성이 있다. 산과 바다, 하늘을 한데 품은 찬란한 자연의 도시 부안. <홍길동전>의 허균이 지나치지 못하고 작품을 써내려 갔다던 영감의 도시 부안. 부안이 가진 색을 현대의 문화로, 예술로, 삶으로 옮기며 새로운 일상의 색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현장에서 만나보았다.
상생의 색을 찾는 여정, 부안군 문화재단
전통과 예술, 더 나아가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을 어우르는 문화. 오랜 시간을 지나온 도시의 문화는 빼곡한 시간을 담고 있다. 그 속에서 새로움을 찾는 일은 지나온 시간 이상의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살지만, 공유하는 이야기는 다른 세대. 이들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지역문화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막 설립 3년차를 지난 ‘부안군 문화재단’이 그 주인공이다.
부안군 문화재단 예술융합팀 이주환 팀장 ⓒ(재)지역문화진흥원
“단순히 ‘부안군에 있는 문화재단’으로 남기보다는 지역민과 함께 부안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재단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부안의 문화는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 문화를 지금의 부안에 맞게 살려내는 방안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재단으로서 걸음마를 뗀 지 이제 막 3년. 아직은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 있지만, 동시대의 부안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예술인들과 함께 지역문화를 고민하고 콘텐츠와 사람을 연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문화재단이 되는 것이 우리의 지향점입니다.”
문화와 사람의 ‘예술적 접점’을 강조하는 예술융합팀의 이주환 팀장. 그는 ‘지속’과 ‘상생’이라는 두 개의 틀 안에서 지역문화 발굴과 예술인 양성에 대해 고민한다.
“설립 첫 해에는 많은 양의 사업으로 문화적 접점을 넓히는 데에 중점을 뒀어요. 하지만 지역 인구가 줄고 있는 상황에서 지속성에 대한 아쉬움이 따랐습니다. 문화재단이 준비한 사업을 즐기는 세대가 한정적이라면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없으니까요. 사업의 호응이 어르신들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문화 방향성을 찾는 일이 우리가 풀어야 숙제가 되었습니다. 또, 부안에서 어떤 분야의 예술인들이 활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수집도 필요했어요. 우리와 함께함으로써 활동 분야에 대해 홍보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고 싶었거든요.”
인구 소멸의 시대, 다양한 지역에서 젊은 세대가 향유할 수 있는 문화를 모색한다. 부안 역시 군 단위의 도시로서 이에 대한 고민을 피할 수 없었을 터. 지역을 찾는 다양한 세대의 상생을 위해 부안군 문화재단이 주목하는 것은 무엇일까.
“부안의 젊은 층은 매우 다양한 활동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학생 신분인 수도권과 달리 20대 청년들이 농사를 짓는 등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문화적 니즈가 더 세부적이죠. 우리는 부안의 자원으로 그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와 놀거리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어요. 현장에서 직접 소통하며 친해지려고 노력하죠. 아직 시간이 필요한 단계지만, 지역 내에서 문화로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지역문화의 지속성과 이를 통한 상생.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이 과제를 풀어가야 하는 부안군 문화재단의 어깨가 무겁다. 설립 3년을 지난 시점에서 이주환 팀장의 다짐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아무래도 재단엔 타지인이 많기 때문에 설립 초기엔 지역에 잘 융화되는 것이 개인적인 목표였어요. 또, 우리가 준비한 사업을 통해 지역민들이 일상에서 문화적 감수성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랐고요. 그래서 어르신, 특수 교육 대상자 등 다양한 계층을 고려한 자체 프로그램과 공모 사업을 많이 진행하고자 했어요. 문화를 통해 지역민과 친구가 되고 싶었거든요. 특히 공모 사업은 최대한의 도전을 하려고 해요. 공모가 모두 선정되어 주민들이 받는 혜택이 확장되었으면 하거든요. 문화를 통한 세대 간의 상생만큼 문화재단과 주민이 상생하는 부안군을 만들고 싶습니다.”
노을버스킹: 우리는 지는 해를 좋아해
부안의 고등학생들로 구성된 지역 활동 기반 청소년 밴드의 버스킹 공연 프로젝트. 지역에서 활동하는 학생 밴드의 공연을 통해 ‘노을맛집’ 부안을 알리고자 하는 지역 브랜딩 사업의 일환. 부안 지역 기반 청년 단체인 ‘시고르청춘’과의 협력 운영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확보한 청년 주도의 대표적 문화 행사.
부안 시고르잡화점
부안 사랑하는 청춘들이 모여 지역에서 받은 영감을 상품으로 브랜딩,
로컬크리에이터들의 특색 있는 제작 상품을 만날 수 있는 상점.
취향 맞춤 여행 프로그램을 안내 받을 수 있는 부안의 필수 코스.
의류, 식기류, 문구류, 잡화 등 부안의 자연과 문화를 담아낸자체 제작 상품 판매.
- 전북 부안군 부안읍 매창로 195 시고르잡화점
- 운영시간 : 11:00 ~ 18:00 / 월화 휴무
- 문의 : 0507-1363-0364
공간에 기억을 담다, 부안 예술공방
(좌)부안 예술공방 외경 ⓒ내러티브아키텍츠건축사사무소
(우)부안 예술공방 전시품 ⓒ(재)지역문화진흥원
생존하기 위해 집단이 꾸려온 역사는 문화를 융성하게 한다. 너른 해안가를 살아온 옛 사람들의 땀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매화풍류마을. 이곳의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 만들었던 공간은 시간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기억이 되어 부안의 새로운 문화 활력을 만들고 있다.
민족 고유의 제염법으로 소금을 생산하며, 수산업으로 먹고 살았던 마을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매화풍류마을의 곰소염전. 운영이 중단된 후 10여 년 동안 방치돼 있던 이 소금공장이 지역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구도심 도시재생의 촉발점이 된 ‘부안 예술공방’의 이야기이다.
부안 예술공방 외경 ⓒ내러티브아키텍츠건축사사무소
부안 예술공방 내부 ⓒ내러티브아키텍츠건축사사무소
빛나는 염전의 소금은 새하얀 건축물로서 표현되었고, 해안선을 따라 물감처럼 번지는 붉은 노을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건물 외관은 해안마을의 옛 기억을 색으로 담아낸다.
고령의 주민들을 위한 쉼의 공간, 지역의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이 마을과 소통할 수 있는 건물을 만들고자 한 젊은 건축가의 고민을 가늠하게 한다. 이로써 마을에 머무는 이에겐 문화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예술인에게는 지역의 이야기 담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며, 부안의 문화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협업 공간으로 자리한다.
건물의 쓰임은 건물이 위치한 공간의 성장과 지속성에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쇠락한 소도시의 재생사업은 대부분 폐건물을 활용해 침체된 상권을 살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부안 예술공방이 갖는 의미는 크다. 부안의 전 세대와 더불어 타지인까지 함께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시설로 운영되어 마을의 자생 역량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연계사업을 발굴하고 있다는 부안 예술공방. 작은 해안마을의 이야기를 이어 나갈 이 기특한 공방의 역할이 기대된다.
부안 복합커뮤니티센터
지역 사회의 발전과 주민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하는 복합공간.
부안복합커뮤니티센터의 1층은 상생협력상가로, 지역 소상공인들과 주민들이 상생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 2층은 강의실과 세미나실, 다목적실 등이 위치,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문화 활동 공간으로 활용
- 주소: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석정로 210
- 운영시간 : 10:00~18:00 (월, 공휴일 휴관)
- 문의 : 부안군청 도시재생과 063-580-4870
부안군 청자박물관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에 걸쳐 사용되던 고려청자 가마터에 세워진 고려시대 장인들의 삶과 예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청자 박물관.
천년 역사를 간직한 청자의 비색(秘色)을 볼 수 있는 역사 문화 공간
- 주소: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부안읍 당산로 91
- 운영시간 : 하절기 10:00~18:00 / 동절기 10:00~17:00
- 문의 : 전시문의 063-580-3964 / 체험문의 063-580-3960
석양과 바다 그리고 영화 : 부안 무빙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해수욕장이자 부안의 가장 아름다운 바다, 변산해변. 서해의 멋진 석양으로 붉게 물든 하늘과 청량하게 펼쳐진 바다의 조화가 장관을 이루는 이 곳에도 지역과 문화의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움직임이 보인다. 도시의 캄캄하고 네모반듯한 극장이 아닌, 한여름 바닷가의 노을이 배경이 되는 특별한 영화 축제, ‘팝업 시네마: 부안 무빙’이다.
팝업 시네마:부안 무빙 ⓒ무빙시네마
팝업스토어의 개념을 영화제에 도입하여 지난해 첫 선을 보인 이 축제에는 대한민국의 명소 이곳저곳에서 새로운 영화 예술 축제가 펼쳐지기를 바라는 예술인들의 희망이 있다. ‘전국의 아름다운 명소를 찾아 움직이며 지역에 맞는 영화를 선보이고 싶다’는 뜻을 담은 ‘무빙’이라는 이름에서도 눈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문화를 전달하고 싶은 전혜정 총감독의 간절한 바람을 볼 수 있다.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을 극대화한 종합 예술입니다. 영화와 자연이 어우러져 새로운 방식으로 지역과 소통하는 특별한 무대이지요. 이미 충분히 많은 영화제가 있기 때문에 비슷한 틀의 영화제를 새롭게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빙’을 단순한 영화제로 기획하지 않았어요. 영화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고민이 먼저였어요. 영화라는 예술 콘텐츠가 하나의 매개체가 되어 지역에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지역 자원을 배경으로 축제 속에서 영화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어요. 그렇게 영화와 자연이 만나는 미래형 영화축제 ‘무빙’이 나오게 된 것이죠.”
부안 무빙 행사 중 전혜정 감독 ⓒ무빙시네마
부안 무빙은 야외 영화 상영이라는 단순한 틀을 넘어, 지역 고유의 자연 속에서 미적 경험을 느끼고 그 안에서 감정의 자극과 심미적 판단을 유도하는 축제로 기획되었다. ‘사랑’이라는 주제로 선정된 세 편의 영화와 미술 전시 등의 해변에 설치된 다양한 기획전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보는 듯한 감동을 선사하며 그동안 지역에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색의 예술적 경험을 견인한다.
예술과 로컬, 변화를 그리다.
지역에 사람의 발길을 모으는 일은 로컬이 풀어야 할 오랜 과제이다. 지금의 중소도시에선 생존을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살 만하고 올 만한’ 로컬 브랜드를 고민한다. 특산물의 상품화와 더불어 글로컬(Glocal)이라 불리는 지역의 세계화를 실현하고자 지역 전통축제, 부대 행사 등을 국내외 관광객 수요에 맞추어 새롭게 단장하기도 한다.
전혜정 감독 ⓒHyejung Jeon
행사 중 지역문화진흥원 ‘문화가 있는 날’ 부스 ⓒ(재)지역문화진흥원
“한 사람이 또는 하나의 행사가 지역의 변화를 한순간에 이룰 순 없어요. 문화는 시간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행사를 며칠 동안 한다고 해서 당장 눈에 보이는 큰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충분한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이어간다면, 함께 배우고 성장하며 지역과 문화의 새로운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전혜정 감독은 로컬 축제의 브랜드화를 두고 장기적 관점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 급급한 것이 아닌, 지속성과 성장가능성을 주안점으로 두고 점진적 변화를 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지인이 오면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과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얻게 돼요. 이를 기반으로 다음 축제에서는 이전과 다른 준비 과정이 생기죠. 이렇게 성장하며 변화를 보는 거예요. 로컬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모든 지역의 특색이 다르기 때문에 각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를 살린 축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의 소통이 우선되어야 하고, 다양한 외부 시각을 받아들이는 개방성, 그리고 지역과 세계가 만날 수 있도록 글로컬한 접근이 필수적이에요.”
변산반도에 자리잡은 부안은 자연 그대로 아름다운 색을 지닌 곳이다. 부안의 사람들은 지역의 역사가 만들어 온 다채로운 색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를 부단히 살아간다.
해변의 노을과 영화, 새하얀 가능성을 지닌 문화공간, 그리고 지역민의 일상에 생경한 문화 활동. 자연과 역사, 전통과 현대,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부안은 긴 여정을 통해 더욱 풍부하고 깊이 있는 색을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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