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땅이 작아도 삶의 터전을 잡는 일은 만만치 않다. ‘탈 도시’와 ‘도시 회귀’ 사이에 그려지는 변곡점들의 이름은 진학, 취업, 결혼, 내 집 마련 등으로 불리는 당면한 삶의 과제들이다. 정주할 곳을 결정하고 나면, 시민은 이주와 동시에 장소의 일부가 되고, 공동체의 성원이 된다. 각자가 처한 현재의 삶의 조건은 장소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생각처럼 삶이 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습관처럼 ‘자기 탓’에 먼저 손을 대고 ‘남 탓’으로 소소한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 삶에 벼락처럼 찾아온 위기는 공동체에 닥친 변화이자, 도시나 국가에 드리워진 먹구름이다. 하지만 의외로 우리는 자신이 사는 곳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역의 향토사를 공부하고, 배출된 인물의 족보를 꿰뚫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 현재의 정치・경제・문화적 지형도와 내가 속한 공동체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늘 생계의 뒷전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우리의 삶의 모든 국면은 우리가 터 내린 장소와 공진하고 있다.
군산, 거제, 제인스빌(Janeseille) 그리고 메데진(Medellin)이 공통으로 딛고 있는 것은 폐허의 풍경이다.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도시는 조금씩, 아주 천천히 기울어져 갔지만, 넘어짐은 순식간이었다. 잘 몰랐고 알았더라도 막을 수 없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들을 대처하긴 쉽지 않다. 일상의 붕괴라는 임계를 넘어 본 도시들의 이야기는 분명 남의 이야기지만, 내내 초조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불안한 기시감이다.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역사가 타인의 이야기라면, 기억은 나와 우리의 이야기다. 근거리의 과거에서 배달된 이들 도시의 이야기는 온통 ‘너와 나’로 채워져 있다. 기둥이 무너지고 터전이 기울어져 갈 때, 끝끝내 서로를 버티며 재건을 말할 대상도 ‘너와 나’이기 때문인 걸까.
소개하는 네 권의 책에서 타인이고 외지인이지만 누구보다도 진심인 필자들의 집요하리만치 성실한 취재를 통해 우리는 마침내 하나의 장소를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터득한 도시를 읽는 눈은 우리 앞에 놓인 폐허의 풍경 넘어, 혹은 그 이면을 볼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덧댈 미래를 향한 모든 노력은 위기를 넘어 살만한 로컬(도시)의 이야기로 갈음될 것이다.
Ⓒ세종서적
공장이 떠난 도시에서
-에이미 골드스타인, 「제인스빌 이야기」(세종서적, 2019)
미국 위스콘신 주 제인스빌은 미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90번 고속도로에서 시카고~매디슨 구간의 4분의 3지점에 있다. 제너럴 모터스는 1923년 밸런타인데이부터 제인스빌에서 쉐보레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85년 동안 도시의 생활 리듬을 규율했다.(10쪽)
그랬으니만큼 꽁꽁 얼어붙은 2008년 12월 아침에 자동차 생산 라인이 멈췄을 때, 앞으로의 사정은 이전과 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제인스빌 사람들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2008년과 2009년, 제인스빌과 인근 지역에서는 9,000명에 이르는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13쪽)
<워싱턴포스트>의 기자로 일했던 에이미 골드스타인은 GM 공장이 폐쇄된 뒤 7년에 걸쳐 제인스빌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했다. 공장 폐쇄가 발표된 이후에도 ‘설마 GM이 떠나겠어?’라는 막연한 낙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고, 그럴수록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도시의 식당, 마트, 편의점 그리고 심지어 어린이집까지 도미노처럼 문을 닫았다. 재교육을 받아도 더 나은 일자리를 찾기는 어렵고, 주식 시장, 부동산 속보 뒤에서 제인스빌의 노동계급이 처한 상황은 수많은 미국 소도시의 전형이었다. 휴직까지 해 가며 긴 시간을 들여 제인스빌의 노동자와 가족들의 삶을 취재하고, 마치 소설처럼 생생하게 개개인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호명해 낸 작가의 분투는 지역 공동체의 변화와 재건을 위한 제인스빌 주민들의 분투와 닮았다.
이 책을 통해 대형 공장이 지탱해 온 제조업 도시의 일상, 중산층 노동자 가족이 겪는 삶의 총체적 변화를 목격하는 동안 영화 <나, 다니엘 브레이크>와 <다음 소희>를 관통하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들리면 좋겠다. 실직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뒤흔드는 거대한 사건이지만, 삶을 지속하기 위한 영웅적인 노력은 거기에서도(제인스빌에서도), 여기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부키
기업과 공장이 사라진 도시는 어떻게 되는가
-방준호, 「실직도시」(부키, 2021)
GM이 제인스빌을 떠난 후 딱 10년이 지난 2018년 한국GM은 군산을 떠났다. 그보다 한 해 앞에는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가동을 중단했다. 제인스빌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군산에서 일어났다. 저자인 <한겨레21>의 방준호 기자는 ‘몰락한 도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안고 군산으로 향했다. 6주 동안 군산에 머물며 그곳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 2019년 7월 둘째주 <한겨레21> 커버 기사로 소개했다. 서두에 저자는 적었다. ‘시시콜콜한, 개인적인 이야기로 읽힐 것이다. 세상의 큰 줄기에 닿아 있는, 모두의 이야기가 될 여지도 조금은 있다.’고.
그 후 2년 반이 지났고, 그곳 사람들의 일상은 어떻게 바뀌어 있는지 궁금해 저자는 다시 군산을 찾았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그 뒷얘기를 담겨 있다. 산업 단지 안의 위계(대공장과 협력 업체), 공장 안의 위계(정규직과 비정규)가 없는 공간, 군산이 비용-효율 그래프로 운명이 결정되는 부속품이 아니라 그저 군산으로 의미 있기를 바랐지만(285쪽), 이렇다 할 반전은 없었고 삶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이 책을 쓴 이유, 쓰인 이유를 방준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다만 그런 이야기가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믿었던 공간의 질서가 의지와 무관하게 무너질 때, 무너지는 까닭이 그저 세상이 변해서일 때, 변한 세상에서 나와 내 공간이 의미를 잃었다고 모두 말할 때, 사람은 어떻게 슬퍼하고 또 위로받는지(302쪽).’ 불행을 함께 겪는 공통의 감각이야말로 연대의 가능성이 되고, 위로가 될 것이라고도 덧붙인다.
Ⓒ오월의봄
산업도시 거제, 빛과 그림자
-양승훈, 「중공업가족의 유토피아」(오월의봄, 2019)
대한민국 애국가 배경 화면에도 나오는 30년 조선업의 역사는 노동자 공동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묶어냈다. 퇴근할 때도, 미팅에 나갈 때도 작업복을 입고,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려가며 맞닿은 표면적은 넓고도 투명해 보였다. 긴 호황기를 지나 2015년대 중반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조선업은 기업의 구조조정과 공적 자금투입이라는 자구책에도 불구하고 위기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도시가 유령도시처럼 흉흉해지자 노동자의 연대는 쉽게 조각나고 깨어졌다. 사측과 노조의 대립 속에서도 정규직, 비정규직, 하청, 물량팀의 입장이 다 다르다. 비로소 드러나는 계급과 계층의 문제들은, 일이 터진 후에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법이니까.
진짜 가족들도 붕괴됐다. 거제 조선업과 근로자 가족의 이야기는 2017년에 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로 먼저 만난 적이 있다. 졸업 후 보통은 조선소 경리로 취업하는 인생 루틴이 예고된 거제의 상업 여고생들이 댄스스포츠반에서 춤을 추는 이야기다. 경남, 부산, 서울로 갔다가 결혼 적령기가 되면 다시 거제로 돌아와 아버지가 마련해 준 아파트에 사는 것이 선배 땐뽀걸들의 삶이었다면, 지금의 땐뽀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파트를 준비해 주지 못하고, 안정된 미래가 보장된 젊은 청년 노동자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 몸소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이야기다.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인 저자 양승훈은 대우조선해양에서 5년을 일했다. 대학에서 정치학, 문화연구・인류학을 공부하고 이례적으로 조선소에 취업했다. 한 인터뷰에서 말하길 ‘솔직하게 돈을 많이 벌고 싶었고, 실제 샐러리맨의 입장에서 조직 문화를, 노동조합의 생각을 알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썼다. 무거운 제목을 지탱하듯 진지하고 아픈 내용이지만, 유쾌함을 잃지는 않았다. 르포형식이지만 일기에 가깝다. 다른 세계에 대해서 알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열어주는 책이다.
Ⓒ서해문집
마약의 수도는 어떻게 전 세계 도시의 롤모델이 되었나?
-박용남, 「기적의 도시 메데진」(서해문집, 2023)
‘셀럽의 셀럽’이 있다면, 콜롬비아의 ‘메데진’은 ‘도시들의 도시’다. 그래서 ‘셀럽 도시’라고 불리는 이 도시에서 일어난 기적은 악명 높은 마약 도시에서 세계 최고의 혁신 도시로 탈바꿈하는 일이었다. 가장 중요하고 큰 질문은 ‘어떻게?’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살인의 수도’라고 불릴 정도로 살인율이 높고, 공포가 지배하던 도시를 바꾼 요인을 요약해 달라면 탁월한 정치인, 시민들의 창의적인 활동, ‘사회적 도시계획’과 ‘도시침술(특정 지역에 자극을 줘 주변 지역을 되살리고 생기가 돌게 하는 도시재생 방법의 하나)’ 등의 단어를 나열할 수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 각 장으로 들어가 엄혹했던 메데진의 과거와 달라진 모습, 그 변화를 이끈 도시철학과 이후 도시가 향했던 생태 교통 체계, 도시 재생 사업, 문화와 기술 혁신, 감염병과 기후 위기 극복 전략으로 등장한 ‘시클로비아’(도시 자전거 타기와 육체적 운동을 위해 매주 거리를 폐쇄하는 프로그램)의 탄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셀럽시티 메데진의 그늘과 향후 과제까지 훑어야 비로소 하나의 서사가, 닮고 싶은 도시가 만져질 것이다.
도시학자이자 지속가능도시연구센터 소장인 저자 박용남은 책을 집필하며 두 가지 소망이 생겼다. 첫 번째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복원하고 기후 위기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모험심 강한 전사들의 성장에 기여하고 싶다는 것이고, 둘째는 미국, 유럽, 그리고 일본의 경험만 맹종하는 학문적, 정책적 사대주의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것이다(6쪽). 궁금하다면, 뜨끔하다면, 혹은 ‘기적’을 믿는다면, 메데진의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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