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지금 사는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이주한 지 딱 10년 되는 해이다. 그런데 작년 연말부터 마음이 심란했다. 십년 전의 호연지기는 많이 줄었고, 체력도 많이 떨어졌다. 글 쓰고 강의하는 사람이라 지역에서 일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부담은 크지 않지만, 철도와 버스 같은 대중교통이 크게 줄어서 자동차 없이는 외지로 다니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지방소멸을 걱정하지는 않지만 그동안 정부가 제대로 된 농촌·농업 정책을 제시하는 걸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십년은 나쁘지 않았는데 앞으로의 십년을 장담할 수 있을까? 나와 가족은, 그리고 이 지역은 십년, 이십년 뒤에 어떤 모습일까?
인구와 일자리 얘기는 이제 그만!
해마다 인구는 감소해 왔지만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중장기 계획에서 인구가 줄어드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옥천군의 인구도 매년 줄어 5만 명 아래로 떨어지는데 중장기 계획의 적정인구는 10만 명으로 잡혀 있다. 출생율은 낮고 고령화율은 높아 인구의 자연 감소를 막을 수 없는데 어떻게 인구가 늘어난다는 걸까? 지금의 인구감소는 예측하지 못한 일일까? 왜 행정은 발전과 증가 계획만 세우지 축소와 적응 계획을 세우지 않을까?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는 『인구감소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위즈덤하우스 2019년)에서 예상된 인구감소를 인정하지 않고 낙관론만 펼치는 관료들을 무책임한 보신주의라고 비판한다. 관료들은 “낙관적인 상태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통계자료를 유리하게 해석하거나, 위험 가능성을 낮게 예측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지혜’”를 발휘하며 책임을 회피한다(27쪽). ‘나 때만 아니면 돼’라는 지혜는 개인의 책임을 미루고 사회의 실패를 앞당긴다.
「인구 감소 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 저출산, 저성장 시대를 맞이하는 미래 세대를 위한 처방전 (우치다 다쓰루 외, 위즈덤하우스) ⒸYES24
그러면서 우치다는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꼭 나쁜 일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구가 줄어들고 시장이 축소되고 경기가 나빠지면 인류 문명은 붕괴하는가? 우치다는 오히려 지금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극한의 경쟁보다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더 성숙해질 수 있는 체계,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참가자들에게 인간적인 성숙을 요구하는 체계”(44쪽)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인구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적응하며 적절한 규모의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이야기이다.
사실 인구가 문제인 것처럼 얘기되지만, 정말 문제는 정부와 기업이다. 중앙정부가 균형발전기금, 지방소멸대응기금을 편성하지만 그런 지원을 받는 사업들이 주민들에게 닿는 경우는 드물다. 지방정부가 주민들한테 물어보면 될 일을 컨설팅회사와 전문가들에게 맡기니 비슷한 그림들이 여기저기 등장한다. 지역의 정체성을 살린다지만 실제로는 다양성을 훼손하는 사업들이다.
특히 일자리만 있으면 지역이 살아날 것처럼 얘기하고, 힘이 약하니 메가시티로 뭉쳐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그건 너무 쉬운 해법이다. 일자리가 없다는 농촌에는 일하러 온 이주노동자들이 수만 명에 이른다. 농어촌 일자리의 질이 낮다면 그 질을 높이면 되는데, 농수산물 가격이 오를라치면 정부가 나서서 외국산 농수산물을 수입한다. 지금 상태론 식량주권은 고사하고 위기조차 피하기 어렵다. 그리고 도시의 질 좋은 일자리에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나? 농촌이나 도시나 질 좋은 일자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건 일자리나 임금만이 아니다. 인간관계, 생태적인 환경, 공공서비스에 대한 접근성, 문화의 다양성, 건강, 시간과 에너지의 자기결정 등 다양한 기준이 존재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척도로 보면 지방의 가치도 달라질 수 있다. 공백 없이 빽빽한 물리적인 공간과 서로 부대낄 수밖에 없는 관계, 빠른 속도 등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중심부에 가까운 건 분명 우월감을 주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은 피로를 증가시킨다. 그리고 피로사회에서는 타자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이 뿌리내리기 어렵다.
반면에 지방은 변경에 있지만 그래서 비교적 느린 사회이다. 자원의 부족을 미화할 생각은 없다. 다만 지방은 관심과 간섭의 거리가 멀지 않은 공간이고 그래서 비교적 장단점이 분명하다. 단점을 고려하며 질문을 던져보자. 심각한 불평등과 예고된 기후·식량·에너지의 위기 등에서 어떤 사회가 더 잘 버틸까? 인구가 많은 곳이 더 잘 버틸까?
지역과 보고 배우는 힘
얼마 전 지역방송사의 프로그램이 전국으로 역주행하는 일이 있었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자기 재산을 털어 학교와 장학회, 각종 시민사회운동을 사심 없이 지원했던 사람에 대한 기록인 <어른 김장하>는 ‘김장하 투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방에도 이런 인물이 있었다니 놀랍다는 반응도 있지만 이미 그 지역에서는 어지간한 사람들이 알던 인물이었다.
다큐 어른 김장하 ⒸMKTK
수도권보다 자원이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지방에서 어떻게 이런 인물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물질적인 총량으로만 따지면 수도권이 훨씬 부유하지만 그 부를 활용할 관계와 부의 가치에 대한 상식은 사뭇 다르다. 이게 무슨 호들갑일까 싶을 정도로, 그 양반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은 지역에 꽤 많다. 나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보다 힘없는 사람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이 지방이라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특별한 관심은 그만큼 사회가 많이 망가졌음을 뜻한다.
‘어른’이라 불리는 인물이 맥락 없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진주에서 사재를 털어 봉양보통학교를 세우고 3·1운동과 국채보상운동, 형평사(衡平社) 운동을 이끌었던 벽촌 강상호는 김장하의 좋은 모범이지 않았을까? 사실 정3품을 지낸 양반가의 자식이 백정들과 손을 잡은 것 자체가 당시 사회의 혐오에 가장 적극적으로 맞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받을 만한 사람이 있는 것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
그리고 진주에만 그런 인물이 있었을까? 부산에는 나라를 되찾는 일을 살림살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던 백산 안희제가 1914년에 세운 ‘백산상회’가 있었다. 곡물, 면포 등을 파는 회사였고 영남의 지주들이 주주로 참여했던 백산상회는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국내로 보급하고 임시정부의 경비를 마련해 전달하는 통로였다. 일제의 탄압을 받자 안희제는 만주로 망명해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고 활동하다 대종교를 탄압했던 임오교변(1942)으로 체포된 뒤 사망했다.
우리 동네에도 안티조선운동을 다룬 다큐영화 <옥천전투>의 주역이자 옥천신문 창간을 주도했던 오한흥이 있다. 거대한 언론 권력에 맞서 언론의 역할을 바로잡는 실험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고삐 풀린 망아지, 옥천에서 일내다」 풀뿌리 언론의 희망 오한흥 (정지환 저, 푸른나무) ⒸYES24
아마 찾아보면 지역에 이런 사례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꼭 특정한 인물에만 주목할 필요도 없다. 액수에 매혹되지 않고 눈을 낮춰보면 이미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사는 옥천만 해도 옥천신문과 옥천공동체라디오가 있다. 옥천신문이 처음 만들어질 때도 주민들이 주주로 나섰고, 재작년에 공동체라디오가 만들어질 때에도 지역에서 돈이 1억 원 넘게 모였다. 잘 사는 동네도 아닌 농촌에서 어떻게 그만한 돈이 모였을까? 척박한 불모지 땅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까?
하고 싶은 게 없음의 힘
처음 단독주택으로 이사 와서 맘껏 뛰고 소리칠 수 있어 좋다고 했던 어린이는 올해 중학교에 들어갔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없다’고 답한다. 학교를 다녀온 뒤에 디스 코드로 친구들과 대화하며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중학교의 성적이 취업과 삶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초경쟁사회 한국에서 이 어린이의 답변은 뭔가 불안해 보인다.
그렇지만 어린이는 생명을 갈아 넣은 SPC 빵을 먹지 않고 ‘결정장애’라는 말이 장애를 비하한다며 쓰지 않는다. 짐을 진 어르신을 보면 도우려 하고, 아픈 사람을 보면 돌보려 한다. 이 어린이의 삶은 관계로 이어진 이 지역에서 그리 특별하지 않다.
옥천 공동체라디오 스튜디오 Ⓒ지역문화진흥원
옥천 공동체라디오 편성표 Ⓒ지역문화진흥원
나는 작년부터 옥천공동체라디오에서 일주일에 한번 <우리의 이후>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시사나 지방정부 예산, 옥천신문 기사 등을 다루는 다소 재미없는 프로그램이다. 반면에 이 라디오의 가장 인기 프로그램은 K-팝을 다루거나 청소년들이 직접 기획부터 대본, 진행, 엔지니어링까지 담당하는 프로그램들이다. 이 지면에도 잠깐 소개된 적 (<옥천신문>은 주민들이 가장 무섭다, 2022년 봄호) 있는데, 발언권을 가진 청소년들은 당당하고 기운차다.
당연히 이곳에도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려는 청소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청소년도 있다. 그렇지만 엄청나게 달라진 삶을 기대하는 청소년은 별로 없다. 욕망하는 것보다 무엇이 더 올바를지 생각하는 힘이, 또 그런 판단을 도울 관계가 지역에 있다.
사실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 이른 시기에 결정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지방은 그나마 속도가 느린 곳이다. 정보가 느리다는 것은 아니다. 유튜브, SNS로 이어진 세상에서 정보는 넘쳐난다. 다만 이곳은 본대로 실행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것이 격차로 느껴지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적절한 완충제 역할을 한다. 욕구와 욕망을 바로 풀 수 있는 곳과 준비해야 하는 곳의 차이라고나 할까.
자녀교육에 좋은 곳을 쇼핑하듯 다니는 학부모들도 간혹 보는데, 언제나 이곳에는 어떤 특별한 장점이 있냐고 묻는다. 떠나려는 사람들조차 대안을 욕망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나는 특별함이나 뭘 더 하려는 것보다 ‘하지 않을 여유’를 만들어 주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힘이 없어서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 좋은 삶은 거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어서 괴물이 되지는 못하는 곳, 그것이 지방의 힘이라면 과장일까. 영화 <생활의 발견>의 한 대사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맙시다”를 바꿔 말한다면 “지방, 인구는 못 채워도 괴물은 되지 못하는 곳이에요.” 내가 지방을 떠나지 않는 건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십년, 이십년이 지나면 이 지역은 아마 더 쇠락할 것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쁜 삶일까, 자연스러운 삶일까.
웹진 <지:문>은 지방 대신 ‘지역’으로 표기하지만, 필자 의견을 존중해 지방으로 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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