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난이 온다』 저자, 철학자 김만권
나눌 것이 많아도 나누지 않는, 이 시대를 향한 ‘저담준론’
코로나 시기에 넷플릭스 등 글로벌 플랫폼을 활용해 한국의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양극화 현상이 드러났다. 디지털화되면 될수록 소수의 아티스트만이 인기를 독점했고, 디지털 랜선 공연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뮤지션은 극히 일부였다. 디지털화가 진행될수록 문화예술에도 양극화가 커진다는 것이 철학자 김만권의 말이다. 양극화와 가난은 우리가 기존에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삶의 모든 분야에 간극을 벌리고 있는 중이다.
시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빈곤의 철학자 김만권을 만났다. 가난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삶의 철학이자 문화적 삶의 선행 조건을 갖추는 일이다. 그의 역작 <새로운 가난이 온다>를 사이에 놓고, 정치철학·사회철학·데이터철학·IT철학 등 현대철학의 제 분야와 경제학과 법학까지 두루두루 던진 질문들을 망치 삼아 우리 삶의 현주소에 ‘왜’라는 문패를 달았다.
- 김만권이라는 철학자는 어떤 철학자인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철학을 한다. 학자마다 철학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나의 경우 내가 살아온 방식, 삶의 방식으로서 철학과 분리되지 않는다. 내가 철학을 하는 이유는 시대의 고민을 해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발을 딛고 철학을 하고 싶어서 세상사에 얽혀 산다. 그래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수 있다.
- 빈곤 철학에 천착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성장배경과 관련이 있다. 부산 영도에서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났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동네였다. 고등학교를 우연히 시내 부자동네로 배정받았다. 영도에 산다고 하면, 그 다음 대답은 누구나 똑같았다. ‘니 영도가?’ 그 말 안에 혐오 차별 배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잘하면 ‘영도인데도 이 정도 하네’ 하는 반응이었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어른들도, 예외 없이 모두가 그런 얘기를 해서 트라우마가 되었다.
영도 사람들을 싸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것을 수시로 들었다. 위험한 사람, 잠재적 범죄자, 빈곤해서 예의도 없는 사람으로 싸잡아서 말했다. 빈곤이 범죄가 되고, 빈곤해서 차별받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반감이 쌓였다. 단지 좌절 때문에 지친 사람도 많고 성실히 사는 사람도 많았지만 대개는 그들의 절망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성실한 삶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 ‘빈곤의 철학자’가 된 이유를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릴 때는 건전한 고민으로 승화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대학은 무조건 서울로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기회가 왔을 때 빨리 도망갔다. 빈곤에 대한 문제의식은 대학에서도 이어갔지만 이를 제대로 고민할 수 있는 철학적 방식을 만나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처음엔 맑시즘에 경도되었는데 거기서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 정치철학에 대한 책을 가장 많이 남겼고 정치철학자로 분류된다.
정치철학은 내 학문 궤적에서 중요한 축을 형성한다. 유학을 뉴욕 뉴스쿨에서 했다. 콜럼비아 대학 출신들이 기존 커리큘럼에 대한 반발로 나와서 구축한 곳으로 여기에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합류하면서 비주류 사상의 메카가 된 곳이다. 여기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곳에 유학 온 학생들 중에 활동가들이 많았다. 본국에서 칼럼니스트로 시민운동가로 혹은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학기 중에 가끔 사라지곤 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면 본국에 데모하러 다녀왔다고 했다. 다들 엄청나게 실천적이었다. 그들이 정치철학과 정치이론을 전공하는 이들을 늘 존중해 주었는데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고 영감을 얻는 것을 보았다. 그들을 통해 정치이론이 세상의 변화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 본인도 적극적인 실천을 하고 있지 않나.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참여사회연구소 인문 사회 경제 법 분야 학문활동을 하는 분들의 연구단체로 활동가 역할을 하는 학자들의 네트워킹 그룹이다. 혼자 있는 사람 옆에 가서 같이 앉아서 말을 걸고, 같이 일어서서 같이 길을 가고 같이 행동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참여사회연구소는 학문적 실천 방식이다.
- 김만권의 철학적 궤적이 궁금하다. 어떤 철학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접하고 큰 감명을 얻었다. 자유주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책에서는 분배 문제에 대한 부분은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그때 존 롤스의 <정의론>을 대하게 되었다. 존 롤스는 자유주의 철학자인데 ‘분배가 중요하다’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 모든 인간에게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져야 하고, 그것이 없으면 자유란 부자유의 자유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내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 말고도 존 롤스가 정치철학자로서 내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서양 세계는 더 이상 공동체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공동체라는 것은 하나의 가치 아래 모인 사람이다. 그런데 서양 세계는 그저 이해관계에 의해서만 모인다는 것이다. 커뮤니티가 아니라 소사이어티만 남았다. 존 롤스는 사람들의 분열된 조건을 비극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정치철학의 임무라고 했다. 거기서 영향을 받아 철학의 임무가 인간과 사회세계의 화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 ‘빈곤의 철학’을 정립하는데 있어 어떤 철학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
박사 논문 주제가 한나 아렌트였다. 한나 아렌트는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정의하지 않았다. 그의 정체성은 ‘정치 이론가’였다. 보통 철학자들은 눈을 들어 우주를 보는데, 그는 발밑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우리를 제약하는 조건을 보고 철학은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철학은 인간사에 얽혀들어야 한다. 그래야 시대의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다. 많은 철학자들이 여기서 도망가려 한다. 철학은 고민을 제기해서 같이 고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철학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내 질문을 알아듣게 만드는 힘이 실제적인 통계라고 생각한다. 중산층 10명 중 8명이 자신이 중산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물을 때 사람들은 더 주의 깊게 듣는다.
-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악의 평범성’을 규명한 작가로 알고 있는데, 이런 면이 있는지 몰랐다.
한나 아렌트는 철학하는 사람들이 고담준론만을 하려고 하고, 추상적 수준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그의 그런 성향 자체가 아이히만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든 것 같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하는데, 타자들과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게 ‘진짜 철학자’가 해야 할 이야기다. 타자와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가 바로 철학의 근본 질문이다. 나와 타자가 있는 철학, 어떻게 같이 안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를 살피는 철학을 하고 싶다.
- 산꼭대기가 아니라 발밑의 현실을 보면서 고담준론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에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데, ‘김만권의 저담준론’이라는 표현이 어떨까 싶다.
맞다. 그렇게 불러도 될 것 같다. 나의 철학적 사고는 낮은 데서 출발한다. 사람들의 사는 얘기서 시작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이긴 한데,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왜 어떤 인간은 안전하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사는데, 다른 인간들은 안전하지도 않고 의미 있는 삶도 살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추상적인 데 있지 않고 현실적인데 있다고 보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보통의 철학이 아니라 정치철학을 하고 있다.
썰렁한 아재개그를 하나 해보자면 이름이 ‘만권’이라 그런지 만권의 책을 읽었나 싶을 정도로 김만권 작가의 저작은 다양한 학문적 인용을 하고 있다. <새로운 가난이 온다>도 읽다 보면 덤으로 20세기의 주요 학문적 흐름도 함께 정리가 된다. 김만권이라는 철학자는 어떤 학문적 궤적을 그렸는지 그동안 썼던 책으로 들여다보았다. 그의 첫번 째 책은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인데 자유주의에 빠져들게 된 계기를 정리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갔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공동체적 가치가 강조되던 시기였다. 그에 대한 반발로 개인의 자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그는 존 스튜어트 밀의 저작을 읽고 자유주의에 입문해 본격적으로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다. 29살 때 원고를 완성한 책인데 이 책이 조명을 받으면서 작가로 본격적인 데뷔를 했다. 이후 정치철학에 관한 저작을 많이 남겼다.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 시선>, <그림으로 보는 정치사상> 등 정치철학 전반을 소개하는 책을 두루 남겼다. 존 롤스의 철학을 나름으로 정리해서 <불평등의 패러독스>를 쓰기도 했다.
- 그때그때 본인이 관심을 가졌던 분야에 대해서 잘 정리해서 책으로 묶어낸다.
유학 중에 잠시 방문했던 2008년은 광우병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때였다. 한 달 반 정도 열심히 집회에 따라다녔는데, 내내 시달렸던 질문이 ‘불법이냐 합법이냐’ 하는 논쟁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불법과 합법은 현상 유지를 위한 수단이고, 진정한 변화는 ‘초법적 행위’에서 온다’라고 했는데 이를 풀어서 <참여의 희망>을 냈다. 또 변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 68혁명 당시 학생 운동권의 이야기를 담은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를 번역했다. 비슷한 이유로 마가렛 캐러반의 <인민>이라는 책도 번역했다.
- 분배철학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나?
그 와중에 연구 방향을 바꾼 사건이 있었다. 개헌 이야기가 나올 때 청년 대상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분배 형식이 바뀌지 않으면 젊은 세대가 고생을 하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 어떤 새로운 분배가 가능하냐고 질문해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기본소득과 기초자산 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 안 해도 괜찮아>라는 책을 쓰게 되었다. 젊은이들과 정책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다. <열심히 일 안 해도 괜찮아>를 쓴 뒤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이나 기본자산과 같은 제도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제대로 썼나 반성이 되었다. <새로운 가난이 온다>는 그런 문제의식에서 쓰게 되었다.
- 철학자지만 저서를 읽다보면 사회학자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여러 데이터를 쓰면서 사회학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다. 사회학이 데이터를 많이 쓰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렇게 융합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회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정치로만, 철학으로만, 혹은 경제로만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발바닥을 딛는 현실을 이야기하려면 이렇게 융복합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직면한 현상은 지금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과거의 총체다.
- 이렇게 사회문제를 지적하는데 본인의 정체성이 왜 사회학자가 아닌 철학자라고 생각하는가?
사회학적 질문과 철학적 질문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사회학은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철학은 ‘왜’라는 질문을 더 던진다. 철학이란 당연시하는 것에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다. 그래서 당연하게 생각하던 편견을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인간이 가난하다는 것이, 성별이 다르다는 것이 서로를 차별하고 혐오하고 비난하는 근거가 되느냐에 더 성찰한다. 예를 들어 정말 게을러서 가난해질까? 이런 편견에 대한 질문을 적극적으로 던진다.
- 정치철학, 사회철학, IT철학, 미디어철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융복합 철학자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기술 발달에도 관심이 많다. 기술이 우리 삶의 조건을 어떻게 바뀌었다고 보는가?
IT기술의 도래가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꿨다고 생각한다. 기술이 삶의 조건을 바꿨을 때 철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치관을 정립하는 일이다. 기술을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은 IT기술을 거부하게 되는데, ‘나쁘지 않을 거다, 괜찮을 수 있다’고 기술과 화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철학의 중요한 임무다. 인간과 기계의 파트너십을 어떻게 맺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있다. 인간을 보호하는 장치가 다 사라지고 있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지적해주고 보완하게 만들어야 파트너십이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다.
- 말씀하셨다시피 김만곤의 주된 철학적 주제는 ‘빈곤’이다. 그런데 빈곤의 문제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왜 이 문제에 천착하는가?
불평등 문제가 빈곤의 시대보다 풍요의 시대에 더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을 양극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어느 때보다 심해졌다. 이제 중산층의 삶도 불안해졌다. 안정적인 삶을 뜻했는데 불안한 삶, 여전히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삶이 되었다. 이런 양극화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 이제 본격적으로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새로운 빈곤은 이전의 빈곤과 어떻게 다른가?
디지털시대 이전의 빈곤 문제는 빈곤한 국가들의 문제였다. 과거의 빈곤은 결핍의 시대의 빈곤이었다. 나눌 게 충분하지 않은 데서 생긴 빈곤이었다. 과거에는 자원 부족이 문제였다.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의 문제로, 결핍의 시대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나눌 게 충분한데도 빈곤하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왜 나눌 것이 많은데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는지가 문제다. 지금 디지털시대의 빈곤은 부자국가들의 문제가 되었다. 국가가 빈곤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국가가 도와주던 빈곤을, 지금은 왜 도와주지 않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는지 성찰이 필요하다.
- 새로운 빈곤의 시대에 생겨난 새로운 문제는 무엇인가?
그때보다 더 안 좋아졌다. 과거는 모두 결핍했지만 지금은 양극화가 되었다. 빈곤에 대한 혐오가 짙어지고 있다. 심지어 빈곤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경멸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부모가 빈곤하다는 이유로 자식들이 경멸한다는 점이다. 그 경멸감을 참지 못해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폭력적으로 반응한다. 자기혐오와 가족혐오를 빈곤이 만들어내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혐오를 내 안에만 담아두지 않기 때문에 바깥으로 터져 나오기 때문에 이는 반드시 타자혐오로 발현된다.
- 중산층 붕괴의 문제도 심각하게 지적된다.
지금의 빈곤은 중산층의 빈곤이라는 점에서도 다르다. 지금 중산층은 안정된 계층이 아니라 예비 빈곤층이다. 통계적으로는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미래를 걱정한다. 미래의 가난을 걱정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면서 극단적 양극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극단적인 양극화로 2대8 사회가 아니라 1대 99 사회로 바뀌고 있다. 통계를 보면 자산 불평등과 소득 불평등 모두 극단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요즘 MZ세대가 ‘외로움’을 많이 겪는 것 같다.
외로움이라는 말은 내가 어려운데 도움을 청할 데가 없다는 말이다. 영국이 외로움부 장관을 임명한 2018년에 국내에서도 외로움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한국리서치에서 진행했는데 20대가 가장 외롭다고 대답했다. 10명 중에 4명 정도가 외롭다고 했고, 외롭지 않다가 15% 정도에 불과했다. 그 다음이 30대, 그 다음이 40대였다. 60대는 20대와 반대였다. 젊을수록 자기 책임의 윤리, 능력주의에 젖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이것의 폐단은 어차피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기에, 나를 도와주기 위해 손을 내미는 사람이 나타나면 누구라도 그 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외로워진 대중들에게 전체주의가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된다고 했다.
- 가난했던 과거에 왜 지금보다 덜 외로웠을까?
과거에는 이익집단이면서도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노동시장의 문제가 작용하는데 평생고용제라서 그랬다. 노동시장의 안정성이 높고 접근성이 높을 때 공동체성이 높다. 반면 접근하기 어렵고 치열해질수록 개인주의적 성향이 더 나타난다. 지금의 공정성 요구는 ‘각자도생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연대도 없고 이웃도 동료도 없다. 과거의 공정성은 타인이 있었고,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을까가 중요했다. 지금의 공정성에는 타인이 없다.
- 타인과의 관계에서 공정을 생각하는 것과 자기 중심으로 공정을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사람들이 공정의 잣대 자체에 대해서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 같다. 심각하다. 공정성의 잣대가 시험으로만 만들어져 있다. <한국의 능력주의>를 쓴 박권일 선생은 이를 ‘시험을 통한 지대 추구’라고 표현했는데,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능력주의의 핵심은 죽을 때까지 증명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능력주의는 고난이도 시험을 한번 통과하면 그것에 대한 기회비용을 얻어가는 것으로 작동하고 있다. ‘내가 이만큼 노력을 들였어, 그러니 나는 이 정도 얻어야 해’라며 시험에 들인 노력의 대가로 생각하는 등가교환의 원칙을 적용한다. 시험으로 실무능력이 판단되지 않는데. 시험이라는 것이 진정한 공정성의 잣대일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 이 능력주의 논리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는가?
‘자기 책임의 윤리’는 각자도생의 논리다. 여기에 빠져 있다. 개인의 실패에 대해 사회의 책임은 없다는 논리다. 우리나라에서는 능력주의와 결합해서 나타났다.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은 능력이 없어서 실패한 사람이 된다. 누구한테도 책임 떠넘겨서는 안 된다.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면 비난을 받는다. 사회에 도움을 요구하면 노력하지 않은 게으른 자가 왜 사회에 요청하느냐는 비난을 듣게 된다.
-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보는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강박관념에서 빠져나올 필요가 있다. 같이 일하고 같이 책임지는, 자기 책임이 아니라 공동책임의 문화가 되었으면 한다. 공감의 시대가 필요하다. 공감이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자기 책임의 시대에 ‘내 고통은 느껴주기 바라면서 타인의 고통은 느끼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같이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 플랫폼 종사자의 노동에 주목한다. 과거의 노동자와 이들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고전적인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자본가가 소유했다. 그런데 세계에서 제일 큰 택시회사가 우버인데 우버가 택시가 한 대도 없고, 세계에서 제일 큰 숙박 회사가 에어비앤비인데 숙소를 소유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큰 소매업체가 아마존과 알리바바인데 이들 역시 매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의 플랫폼 종사자들은 생산수단을 자신들이 소유한다. 플랫폼 종사자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도 더 가난해졌다. 과거에는 생산수단을 자본이 가지고 있고 관리 유지비를 자본이 부담했는데, 이제 생산수단을 일하는 사람이 떠안았다. 생산수단의 구입 유지 관리 비용이 노동에 다 넘어갔다.
- 자본이 지던 의무를 노동에 다 떠넘겨 안고도 노동자로서 권리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낮은 소득을 얻는 비정규직과 플랫폼 노동자는 같은 노동을 해도 4대보험이 안 된다. 노동자이면서도 노동3권을 쓸 수 없다. 4대보험과 노동권은 상위 계층이라 할 수 있는 정규직 노동자에게만 보장된다. 사회복지가 하층을 보호하지 못하고 상층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빈곤은 어려운 사람을 국가가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 코로나19가 이 ‘새로운 가난’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언택트의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이 어려운데 이를 눈으로 봐야 실감할 수 있는데 어려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당연히 이들을 도와주는 사회적 구조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연대를 해야 하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다. 코로나 언택트 시대에 빈곤층의 삶이 더 나빠지고 있다. 권리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라지게 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그들을 안 보이게 했다.
-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팽개칠 핑계가 생긴 셈이다.
지역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면, 지방의 공업지대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거나 대학을 나온 여성들이 취직할 일자리가 별로 없다. 그래서 일자리를 구하러 서울로 상경하는 경우가 많다. 일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기간에 이들은 생활비를 아르바이트로 충당한다. 그런데 코로나 기간에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아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두 가지 패턴이 나타났다. 하나는 교우관계를 끊게 되었다. 친구들을 만나려면 돈이 들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주거비를 줄이는 방식으로 생활비를 아꼈다. 코로나가 사람들을 좀 더 고립시키고 도움이 없는 상태로 만들면서 사람들은 점점 외로운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 국가가 그들을 도와주지 않는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시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자기 책임의 윤리’는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동시에 확산되었던 윤리다. 지구적 시장이 만들어지려면 국가 간의 장벽이 낮아져야 한다. 통일된 시장을 만들기 위해, 국가의 간섭을 줄이기 위해 ‘더 이상 국가의 도움을 바라지 말라’는 윤리가 확산되었다.
- 코로나 시기에 넷플릭스 등 글로벌 플랫폼을 활용해 한국의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각광받았다.
여기서도 양극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디지털화되면 될수록 소수가 인기를 독점하게 된다. 디지털로 랜선 공연을 해서 수익을 낼 수 있는 뮤지션은 극히 일부다. 예술문화도 디지털화될수록 양극화가 커진다. 혜택을 보는 문화예술인은 극히 소수다.
- 우리 대중문화 콘텐츠를 보면 자기 책임주의나 능력주의가 전제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렇다. 드라마를 보면 외계인도 부자여야 하고, 도깨비도 부자여야 한다. 부자가 아니면 도깨비도 외계인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물질주의에 얼마나 경도되어 있나 알 수 있다. 세계 가치관 조사를 보면, 어떤 국가가 경제발전을 하면 타인에게 관용하고 너그러워질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를 확인하는 조사가 있다. 거의 모든 국가에서 물질적인 풍요가 오면 타자에 대해 너그러워진다. 그런데 한국은 예외다. 부유해져도 타자에게 관용하지 않고, 소수자에게 관용하지 않고, 빈자에게도 관용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불평등에 찬성하는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
- 현실을 직시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자체가 문화적 진화다. 누구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는가도 중요하다. 엘리트인 박해수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정재의 목소리로 스토리를 풀어갔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 빈곤의 문제를 까발리고 빈곤한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거나 빈곤한 사람이 부자를 착취하는 전복을 보여준다.
맞다. 누구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가도 상당히 중요하다. 사회에서 루저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시선에서 스토리텔링이 된다는 것은 과거보다 나아진 점이다. <기생충>과 같은 작품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드는 콘텐츠다.
- 우리 문화예술 콘텐츠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고 보는가?
<기생충>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 <오징어 게임> 등 해외에서 히트한 한국 콘텐츠에는 공통점이 있다. 치열한 경쟁, 빈곤, 차별, 불평등 등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편으로 이는 우리 사회가 나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를 드러낼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공개성이라는 측면에서 나아졌다. 이런 공개성을 우리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썼으면 좋겠다.
김만권 소장과 새로운 가난을 살피는 동안 외로움에 시달리는 MZ세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도 더 가난해진 플랫폼 종사자, 능력주의가 전제되어 있는 대중문화 콘텐츠 등을 통해 이 시대의 양극화와 가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자기 책임의 윤리’와 ‘능력주의’에 짓눌린 그들의 마지막 탈출구가 우리의 문화적 삶에 있지 않을까. 커뮤니티는 없고 소사이어티만 남은 사회 나눌 것이 많아도 나누지 않는 이 시대에, 타인과의 관계 맺기는 공정과 책임에 매몰되지 않는 초월적인 방법이자 문화적 삶의 출발점이다. 문화는 능력이 아니고, 각자도생이 아닌 공동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