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런한 가난’을 살다
30여 년 일하던 회사 퇴직을 하루 앞두고 야구장 철망 보수작업 중 크레인 위에서 암 선고 전화를 받았다. 2016년 크리스마스 전날 추운 겨울이었다. 그렇게 나는 30여 년 끼고 살던 붉은 목장갑을 벗었다.
아내 덕에 수술과 치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마른 체격이라 수술 결과도 좋았다. 누구나 그렇듯 처음은 서럽고 ‘하필 왜 나에게’ 화도 났지만, 차츰 세상에 감사하고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도 귀하게 여겨졌다. 아픔보다 더 큰 걱정은 퇴직하면 살려고 마련해 둔 작은 시골집이었다.
평생 소원인 산 아래 작은 남향집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날마다 아내가 출근하고 나면 아파트 뒷산이나 인근 산을 오르며 꽃을 찾았고 들여다보며 놀랐다. 가까운 곳에 이 고운 풀꽃들이 피고 졌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나는 잊고 살았다.
항암약을 먹고부터 입맛이 떨어졌고, 작은 밥 한 공기도 태산이었다. 애써 아내가 마련해 준 밥상 앞에 놓고 날마다 한숨이었다. 집안 분위기는 차츰 무거워졌고, 날마다 출근하는 아내는 힘들어했다. ‘이래서는 안 되지.’ 승용차에 몇 권의 책과 항암약을 챙겨 완주 시골집을 찾았다. 전 주인이 필요한 살림들을 두고 가셨기에 몸만 들어가도 큰 불편이 없었다. 첫날밤을 아주 편하고 달게 잤다.
저 대문 활짝 열고
찾아올 동무를 위해
일찍 등불 걸어야지
저 허청엔 닭장을 지어야지
첫 닭이 울면 어둑어둑 비질을 하고
새들이 오래 놀다가는
바람의 집을 지어야지
_ 시 「귀향」 전문
새벽이면 나는 새들보다 이슬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기다렸다. 산중의 싱싱한 아침은 날마다 눈부셨다. 마당 시멘트 깨진 곳에 채송화 씨를 묻고, 뒤란 개망초 우거진 빈 집터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골이 깊은 산중이라 흙보다 돌이 더 많았다. 호미 끝에 닿는 한 줌 흙이 더없이 귀했다. 돌 하나 빠진 만큼 밭은 커졌고 낮아지며 자리를 잡았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환자라는 사실도 잊었다. 날마다 호미 들고 뒤란에서 지냈다. 햇살과 바람과 새소리 가득한 산 아래 내가 꿈꾸던 가지런한 가난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난 행복했고 눈물 났다. 신문이나 티비, 컴퓨터도 없이 해지면 일찍 자리에 들고 아침이면 마을 길을 산책하며 이웃에 정들었고 땅에 정들었다. 적당한 노동으로 밥맛도 좋았고 잠도 달았다. 근 한 달 넘도록 사람 구경 힘들어도 외롭지 않았다. 채소를 심고 풀 뽑고 집안 정리하고 손보는 데 하루가 너무 짧았다. 여기저기 흩어진 돌들을 허청 옆에 모았다. 돌이 많은 지역이라 땅만 건드리면 돌이었다. 그렇게 우중충한 벽돌을 허물고 평생 소원이던 낮은 돌담을 쌓았다.
뒤안 빈터
달배미 밭을 하나 더 만들었다
마당 꽃밭에 흙을 들일 겸
젖은 돌들이
호미 끝을 거부한다
끝은 늘 부딪친다
끝부터 닳는다
닳은 부분이 끝이 되어
다시 돌 끝에 닿는다
수도 없이 올라오는 돌멩이
큰 돌 하나 빠지면
돌 크기만큼 밭이 된다
허리를 숙여야
호미 끝이 땅에 닿는 법
끝이 되기 위해 끝을 벼리는 호미
세상은 늘 끝이 썼다
_ 시 「끝」 전문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위봉산성 너머 동상면이다. 생활권은 소양면이지만 행정구역상은 완주군 동상면이다. 1970년대까지 전국 8대 오지 중 한 곳이었다. 두 개의 큰 저수지가 있고, 폭포 그리고 계곡과 물이 맑아 연중 안개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외진 산중이다. 난 이곳 수만 리에 정착하여 꽃 키우고 채소 가꾸며 살고 있다. 반려견을 입양하여 하루가 더 풍성해졌고, 얼마 전 컴퓨터도 장만하고 페이스북을 통해 사진과 글을 올리고 세상과 소통하며 부족하지만, 시집도 한 권 냈다.
2019년 어느 날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되었다며 면장님이 찾아 오셨다. 이 지역 출신으로 꽃에 관심이 많은 ‘시인 면장님’이셨다. 완주군은 지역 문화도시로 선정된 지역이다. 우린 함께 의기투합했고 지역 주민들의 글을 모아 시집을 출판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글쓰기 강좌도 열고 글 모르시는 어르신들의 글은 채록하기로 했다. 그러나 코로나 비상시국으로 강좌도 못 열게 되어 지역을 잘 아는 면장님께서 직접 글을 모아 시집을 만들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아름다운 출판기념회도 멋지게 했다.
전북 민예총 미술분과 회원이며 전주 서학동 예술인마을 촌장으로 열심이신 한숙 작가님께서 우리 지역에 나무 의자를 설치해주고 싶다 했다. 민예총 회원과 마을 어르신들이 함께 색칠해서 설치하는 작업이었다. 작은 일이지만 의미 있고 아름다운 공동체적 발상이었다. 새로 부임해온 면장님과 상의했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민예총 회원분들과 십여 분의 어르신들이 동상면 생활문화센터 마당에 모여 오순도순 얘기 나누며 즐겁고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시월의 눈부신 날이었다.
높은 산 보며 늘 낮게 사는 법 배우다나는 하루에 두 번 산책을 한다. 오전에는 산길이고 오후는 마을 길을 걷는다. 이웃 마을까지 한 시간 넘게 걸어도 사람 만나기가 힘들다. 이제 마을 길은 고라니가 더 많이 다니는 길이 되었다. 아무리 훌륭한 지역문화를 가지고 있어도 사람이 있어야 보존, 유지되고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몇 년 안에 몇 군데 자치단체가 사라질 거라는 소식을 자주 접한다. 이대로라면 농촌은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돌아오는 농촌을 만드는 게 국가정책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하는데 모든 정책이 성장경제에만 집중되어 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도 반성이 없다.
지금 이 순간도 나무를 베고 산을 밀어 집 짓는 개발 논리에만 열중이다. 국가의 근본인 농촌, 지역을 살리는 데는 지원이 아니라 공무원처럼 월급제를 실행해서라도 사람들이 돌아오는 농촌으로 만들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코로나19, 광우병 등 국가적 위기 때마다 전 국민이 나서 세계가 놀랄 만큼 신속히 위기 상황을 극복한 저력의 힘도 실은 토착 농민들의 두레, 품앗이, 대동계(大同契) 등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나타나는 오랜 지역 문화의 힘일 것이다.
난 하루 두 번 산책한다
오전에는 산길이고
오후에는 마을 길을 돈다
입석마을 지나 학동마을까지 걷는다
한 시간 넘게 걸어도
빈집 슬픈 개만 만난다
하루 두 번 다니는 버스는
언제나 기사님 혼자다
내가 먼저 고개 숙인다
누가 뭐래도 세상살이
인사가 소통이다
괜히 안쓰럽고 미안하고 그런다
정들어 이제 맞절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산이 다 보고 있다
_ 시 「정들어 이제는 맞절이다」 전문
나는 오늘도 산길 걷는다. 푸른 초록의 산밑을. 나무는 비탈에 살아도 하늘이 중심이다. 나의 중심은 땅일 것이다. 높은 산 보며 늘 낮게 사는 법을 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