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
“나는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주인공 해준(박해일 분)이 서래(탕웨이 분)에게 건넨 말이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서 형사로서의 본분을 저버린 것에 대한 탄식인 동시에 서래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었다. ‘붕괴’라는 단어를 알지 못하는 서래는 곧바로 스마트폰으로 사전을 검색한다.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그 장면을 보면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나도 완전히 붕괴된 적이 있었는가. 삶이 무너지고 깨어지는 상황이란 어떤 것일까.
여러 가지 경우를 떠올려볼 수 있다. 자연재해로 하루아침에 삶터를 잃는 것, 전쟁이 일어나 피난길에 오르는 것,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족과 사별하는 것, 의사로부터 시한부 인생을 통보받는 것, 사업이 망해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된 것,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리는 것 등 수많은 상황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신체적 손상이나 경제적 파탄이 생긴 것이 아닌데 ‘멘붕’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애인의 결별 선언이나 친구의 배신 같은 일을 겪을 때 우리의 삶은 크게 요동친다. 그런 상황에서는 우주가 흔들리고 땅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것의 절반 이상은 인간관계다. 몸이 좀 불편해도, 돈이 좀 부족해도, 주변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으면 행복하다. 반면에 몸은 매우 건강한데 가족과 심한 갈등에 빠져 있다면, 돈이 아주 많은데 밥 한 끼 함께 먹을 수 있는 친구가 아무도 없다면, 결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고 몸도 건강한데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인과의 관계가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존재는 그만큼 절대적이다.
그것을 새삼 확인하게 해주는 사례가 있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 마쓰모토 도시히코 씨는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고통』(2022)라는 책에서 자살 예방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발견한 것을 들려준다. 사람들이 유난히 투신자살을 많이 하는 어느 다리 앞에 설치된 CCTV의 녹화 영상을 분석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강물로 뛰어내리기 직전에 거의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었다. 휴대폰을 열어 잠깐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뉴스를 검색할 리는 없다. 지인의 메시지일 것이라고 마쓰모토 씨는 확신한다. 만일 그 순간에 누군가가 ‘말’을 건네왔다면 많은 자살자가 마음을 바꾸었을 것이라고 그는 추정한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고통』 인간은 왜 취하고 상처 내고 고립되는가(마쓰모토 도시히코 저/김영현 역) ⓒ 다다서재
인간이란 그런 동물이다. 신체적 고통이나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그로 인한 절망감 때문에 자살에 이르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벼랑 끝에서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준다면 살아갈 용기를 낼 수도 있다. 반면에 물리적인 곤경에 처하지 않았지만 단지 외롭다는 것만으로도 삶을 끝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 있다. 사람에게 인간관계는 목숨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할 때가 있다.
돈에 대한 끝없는 갈망도 그 재력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군림하거나 자신의 부를 세상에 뽐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가령 누군가가 당신에게 백억 원을 주려고 하는데, 그 조건으로 지인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평생 혼자 살아야 한다면? 또는 몸에서 악취가 나서 모든 사람이 당신을 혐오한다면? 그래도 좋으니까 그 돈을 받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온전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은 대부분 사회적 관계 속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중독에 빠지는 까닭은
현대인의 많은 곤경은 타인과 적절하게 접속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유아기에 양육자와 충분한 애착을 형성하지 못해 평생 과도한 인정 욕망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알량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복종을 강요하거나 (갑질도 여기에 해당한다) 타인이 부러워할 만한 자신의 모습을 과시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 SNS나 유튜브 등의 미디어 환경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노리나 허츠의 『고립의 시대』(2021)에는 한국의 ‘먹방’이 소개되고 있는데, 유튜버가 식사하는 모습을 시청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성 경험의 시뮬레이션이라고 분석한다. 시청자가 슈퍼챗을 보내면 화면에 표시가 뜨고 유튜버가 자신의 이름을 호명해줄 때 유대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그렇듯 정서적인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 익숙해지다 보면, 실제로 우정을 맺는 것에 서툴게 될 수 있다.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본래 마음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이다. 그런데 미디어를 통해 형성되는 관계는 일방적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인공 지능이나 소셜 로봇도 마찬가지다. 그런 기계들은 외로운 마음을 어느 정도 위로할 수 있지만, 인간이 거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자칫 타인과 관계 맺는 방법을 잊어버릴 수 있다. 그 장치들은 무조건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도록 알고리즘이 설정되어 있기에 사용자가 설령 행패를 부리거나 화를 낸다 해도 고분고분 응대할 것이다. 그런 상호작용에 길들여지면 자기중심적인 성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인간을 대하는 감각이 점점 박약해진다.
관계 부전(不全)의 극단적인 결과 가운데 또 한 가지가 중독이다. 중독의 핵심은 오로지 받기만 한다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 없이 어떤 간단한 행위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중독이다. 그 밑에 깔려 있는 세계관은 무엇일까.
“사람은 배신하지만, 약은 배신하지 않아요.” 위에서 언급했던 정신과 의사 마쓰모토 씨는 중독 환자들에게서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술이나 마약은 어김없이 쾌락을 가져다준다. 약물뿐인가. 현대인이 많이 빠져 있는 스마트폰 중독도 마찬가지다. 그 작은 물건은 일상의 허전함을 틀림없이 달래준다.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물론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지금 세상에는 그렇듯 권태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물질이나 물건들이 곳곳에 넘쳐난다.
중독을 다른 말로 ‘의존증’이라고 한다. 뭔가에 자신을 맡긴다는 뜻이다. 왜 약물이나 도박에 기대는가. 사람에게 마음 놓고 기댈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기대는 법을 배우지 못했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디 허약한 동물이라서 서로 기대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간편하게 어떤 물질의 흡입이나 특정한 행위로 빈 구멍을 메우려는 행위가 바로 중독이다.
그런데 악순환이다. 사랑이나 우정이나 지위를 잃은 뒤에 중독에 빠지기 쉽고, 거기에 탐닉하다 보면 또한 관계 자체를 멀리하게 된다. 뇌과학자 애나 렘키는 『도파민 네이션』(2022)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독은 고립과 무관심을 낳는다. 여러 실험에 따르면 자유로운 쥐는 플라스틱병에 갇힌 다른 쥐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쥐의 본능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쥐가 헤로인을 자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되면, 우리에 갇힌 쥐를 돕는 데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계의 결손은 중독과 맞물려 돌아가면서 상황을 점점 악화시키는 것이다.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함께 하는 존재의 감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청소년들을 만나온 유현경 전(前) 구로온마을지원센터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 징계를 받고 강제 전학을 당한 중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화의 시간을 이끌어야 했는데, 어떤 주제가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흡연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아이들이 모두 담배를 피운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자신에게 흡연은 무엇인지, 어떤 때 담배 생각이 나는지, 피우면 무엇이 좋은지 등에 대해 각자 돌아가면서 생각을 말했다. 사연은 여러 가지였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담배를 끊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끊고 싶어도 왜 잘 안되는지를 짚으면서 금연의 방법을 함께 의논하는 시간을 가졌다. 학업에 관심이 없고 여럿이 진지하게 대화하는 경험도 거의 없는 청소년들이었지만, 자신의 구체적인 고민을 주제로 삼으니까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말문이 열린 아이들의 생활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고, 졸업식을 하는 날에는 일부러 찾아와서 덕분에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 인사까지 했다고 한다.
『도파민 네이션』의 저자는 중독에서 탈출하는 데 한 가지 중요한 열쇠로 ‘근본적인 솔직함’을 강조한다. 한국에서도 마약 관련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것이 있는데, 중독자들이 스스로 약물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는 태도가 치료의 결정적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중독을 극복하려면 타인의 도움이 절실하다. 뼈아픈 과거의 경험을 꺼내놓을 때 그것을 깊게 경청해주고 자신을 있는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주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성찰과 수용의 만남에서 수치심은 자기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사실대로 말하기를 훈련하면 미래 계획, 감정 조절, 지연 보상에 활용하는 뇌 부위의 성능이 높아진다고 한다.
자신의 취약함을 애써 감추는 대신 정직하게 인정하고 드러낼 때 연결의 새로운 통로가 열릴 수 있다. 거짓 자아를 벗으면서 자신과 화해할 수 있고, 부정적 경험과 거기에 얽힌 감정들을 객관화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고 승화시킬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위협과 두려움이 아닌 존중과 사랑의 관계를 확장해야 한다. 에크하라트 톨레는 말한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이미지를 만들거나 자기를 추구하는 에고에 지배되지 않는 관계이다. 진정한 관계는 상대방을 향해 열린 깨어 있는 관심이 있으며, 그 안에는 어떤 바람도 없다. 그 깨어 있는 관심이 ‘현존’이다. 그것은 모든 진정한 관계에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러한 관계를 열어가는 실마리는 어디에 있을까.
어느 워크숍의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강사는 간단한 과제 하나를 내놓는다. 50여 명의 참가자들에게 풍선을 하나씩 나눠줘 불게 한 다음 거기에 자기의 이름을 써넣도록 했다. 그런 다음 옆에 있는 빈방 안에 그것을 모두 집어넣도록 했다. 그리고 제한된 시간 안에 각자 자기의 풍선을 찾는 게임을 하도록 했다.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까. 참가자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풍선들을 뒤적이지만 서로 부딪히고 발을 밟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자기 풍선을 찾아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사가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 한번에 한 사람씩 아무 풍선이나 하나씩 집은 다음에, 거기에 쓰여 있는 이름을 불러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다. 그렇게 했더니 순식간에 모두 자기의 풍선을 손에 쥐게 되었다.
각자도생의 무한 경쟁이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극도의 불안을 자아내는 세상이다. 그 압박에서 서로를 풀려나게 할 수 있는 ‘만남’이 절실하다. 저마다 품고 있는 새로운 존재의 씨앗을 싹틔울 수 있는 토양을 일궈야 한다. 그런데 꼭 친밀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지내는 관계는 오히려 구속과 상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끈끈한 공동체보다는 느슨한 연대가 바람직하다. 중요한 것은 잘난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 너와 나를 있는 그대로 용납한다는 신뢰다. 그러한 에토스 속에서 우리는 함께 하는 기술, 마음을 응시하는 힘,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지혜와 용기를 일깨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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