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판다
토끼는 동물 생태계에서 상위포식자가 아니다. 생태계 피라미드 제일 밑에 있는 토끼는 생존을 위해 영리할 필요가 있었다. 각국의 우화나 속담은 대개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을 반영한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토끼는 일반적으로 약삭빠르게 굴다가 근면 성실한 거북이와의 경쟁에서 지는 것으로 많이 묘사된다. 토끼에 관련된 이야기로 ‘교토삼굴(狡免三窟)’이 있다. ‘지혜로운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 놓는다’라는 말로,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한 가지 대책이 아닌 여러 가지 대안을 마련해두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2023년은 토끼의 해다. 세 개의 굴을 파두는 지혜를 구하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2023년은 토끼의 해, 계묘년(癸卯年)이다. 나는 토끼굴에 빠진 것처럼, 새로운 해를 ‘또’ 맞이하고, 새로운 꿈을 ‘또’ 꾸고, 새로운 생각을 ‘또’ 하면서 근면 성실함을 외칠 것인지, 아니면 세 개의 굴을 파두는 지혜를 구하는 한 해가 될지 ‘또’ 고민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 생물은 약 200만여 종이라고 한다. 우리의 삶 속에는 다양한 생물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인류와 공생하고 있다. 지구의 생명들 단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바로 그 ‘다름’이 어우러져 의미를 생산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도우며 함께 삶’이라는 뜻의 공생(共生)이란 말을 쉽게, 오랫동안 사용해 왔지만 진정 그 뜻대로 행동해왔는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우리는 지역이라는 말을 ‘다른 곳과 구별되는 지표상의 공간적 범위’를 말하는 지리적인 면으로 사용하는 편이다. 다른 한편 지역이라고 하지 않고 ‘로컬(local)’과 ‘로컬리티(locality)’로 사용할 때 우리는 사람과 공간, 시간 등의 관계성의 등장을 깨닫게 된다. 관점에 따른 개념 차이는 있지만, 지역은 인문학적 상상력에서부터 과학적 지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원이 작동하여 삶의 종다양성이 이루어지는 최전선, ‘바로 그곳’이 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역의 ‘주민’으로서 지역문화를 생각한다
그동안 나는 통영시(경남), 서울시, 영국 런던, 성남시(경기도), 부천시(경기도), 원주시(강원도), 그리고 김해시(경남)에서 살았다. 주민등록초본에 등재된 내 삶터, 나의 주소지 변동 횟수는 총 31회다. 런던에서 5회에 이르는 이사를 더하면 총 36번의 이사를 했다. 더듬어보면 첫 이사를 위해 서울역 광장을 나서면서 나는 ‘시골아이’가 ‘서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경외감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현재 ‘서울로 7017’이라 불리는 고가 보행로이자 공원은 1970년에 지어져 2017년에 재탄생할 때까지 서울역을 중심으로 동서부를 연결하던 고가도로였다. 이를 처음 봤던 나는 ‘와, 길이 부풀어 올랐다’며 놀라워했고, 셀 수 없는 높은 건물과 줄지어 달리는 수많은 차를 보면서 신기해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살았던 곳에서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것, 예컨대 규모가 큰 것들은 모두 다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 쌓여 있는 공산품, 농산품들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근간으로 생산되었고, 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세련된 포장으로 내 손에 도달했을 때, 나는 안전한 공정을 거쳤을 것이라 믿었다. 각국의 경제성장률이라는 숫자를 보면서 인류는 전에 없는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여겼다. 그 속의 나는 시대정신에 맞춰서 더욱더 ‘성실 근면’해야 했다. 뉴욕, 런던, 도쿄와 버금가는 서울을 만들기 위해 꽤 오랫동안 불철주야 창의성을 불쏘시개 삼아 생산의 양을 갱신했다.
2022년 김해문화재단 다어울림생활문화센터 주민운영위원회 정기회 Ⓒ 김해문화재단
현재 나는 서울, 수도권에서의 정주(定住)를 멈추고 경상남도 김해시의 주민이 되어 1년 남짓 살고 있다. 그동안 나는 나이를 보태면서 계속 생각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삶의 대부분을 서울과 수도권에서 보내면서 ‘지역문화’를 고민하고 이와 관련된 일을 해왔지만, 왜 해결되는 것의 수보다 다시 생기는 문제가 더 많은지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또 어디서든 살 수 있다고 여기면서도 ‘주된 삶터의 기준이 서울-경기’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어떤 계기로 ‘서울-경기지역’ 혹은 ‘수도권’을 벗어나 서울 기준으로 볼 때 ‘먼’ 곳인 경남 ‘지역의 주민’으로서 삶을 시작하면서 마침내 ‘지역문화’에 대한 그간의 내 생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늘 보고, 듣고, 읽었던 자료이자 지식이라고 여겼던 정보들은 주로 이랬다. “(아파트) 미분양이 늘고, 기존 주택시장이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다”, “세계 경제는 완연한 둔화나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실질가계소득이 감소하는 가운데 이-커머스 매출은 줄어들고 신용카드 미상환액이 늘고 있다. 거시·미시, 생산소비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지표가 부정적이다” 등등. 여전히 내 앞의 정보는 본질 여부와 상관없이 생산을 위해, 생산율을 높이기 위해 앞으로 무얼 더해야 할 것인가를 압박하고 있었다.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2012년 6월 23일 오후 7시, 우리나라는 소위 일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천만 명을 동시에 충족하는 ‘20-50클럽’의 지구촌의 7번째 나라가 되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2020년 기준 인구수는 50,825,557명, 사망자가 출생자 수보다 많은 자연 감소가 시작되었다. 2021년, 정부는 전국의 89곳을 인구감소 지역으로 지정·고시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방소멸대응기금을 신설, 인구감소 지역에 매년 1조 원씩 10년간 투입하기로 했다. 알다시피 우리는 실행의 실질적인 시작과 지속가능한 정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청년 유출, 고령화, 도시기능 쇠퇴 등의 문제가 드러날 것이라는 점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다. 서울, 경기, 인천은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51%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역내총생산(GRDP) 또한 수도권이 앞서 있다.
김해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 ‘소소한 식탁’ Ⓒ 김해문화재단
김해문화재단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어린이 미술대회 Ⓒ 김해문화재단
그래서 말인데, 지역을 지리학적 공간으로 본다면, 또는 이를 자치단체의 영토라고 말한다면, 지금쯤은 생산을 둘러싸고 허용하고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을 재규정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브뤼노 라투르(1947-2022)가 말한 ‘거주하고 생성의 실제를 돌보는 방식의 증가’를 사유해야 하는 것, 생산관계만 중시하는 태도를 넘어서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존재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거주, 자연, 관습, 영토의 유지, 그리고 생활조건 등 생활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물어보면, 지역의 사람들은 논쟁하면서 싸울 거리가 무궁무진해진다. 모든 지역 주민은 자신들의 철학을 가질 권리가 있고, 그래서 ‘전체를 형성하는 자기 자신의 방식’을 생성, 발전시킬 책임을 진다면, 생산에 끌려가지 않고 진정으로 지탱하는 생존을 통해, 예를 들어 기후 위기 같은 의제가 일상에서 동떨어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2022년 김해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 [도시문화실험실] 공유회 Ⓒ 김해문화재단
최근 우리나라는 어느 도시건, 어떤 지역이건, 주체의 여부는 차치하고 문화도시를 지향하고 있으며, 현재 24개의 법정문화도시가 지정되어 문화도시 담론이 보다 더 활발해질 것 같다. 십수 년 전 정기용 건축가가 ‘상식과 기본이 바로 선 도시가 문화도시’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실, 지역문화의 격(格)은 특정한 누군가가 세우는 것도, 특권처럼 여겨지는 것도 아닌, 상식과 기본이 단단한 문화생태계를 의미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이를 실천해 왔는지 모르겠다.
‘격조’ 있게 지역을 사랑한다는 것
오페라 허왕후 공연장면 Ⓒ 김해문화재단
조선시대의 일이다. 평양에서 기녀의 딸로 태어나 여덟 살에 김해로 와서 기생으로 살았던 지재당 강담운이 있다. 지재당은 사랑하는 선비 차산(此山) 배전과 함께 다녔던 김해의 하늘과 산, 강의 아름다움을 시로 썼는데 이것이 <금릉잡시>이다. “구지봉 머리에 붉은 노을 비치고/ 후릉의 송백엔 가을바람 이네./ 상심한 한 조각 파사의 돌/ 늘어진 풀 쓸쓸한 안개 참으로 적막하다.” 김해의 역사 유적지인 구지봉과 허왕후릉의 해질녘 풍경을 아스라이 펼쳐 내준다. 가야시대이건 조선시대이건 그리고 2023년의 김해시이건 간에, 이곳 지역에는 역사와 문화와 의례와 규칙이 있으며, 지재당이 차산 배전을 사랑하고 김해의 풍경을 사랑했듯, 지역문화 사랑법을 격조 있게 만들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야 성장 신화의 볼모가 아닌 주체로서의 생존을 애쓰는 곳, 거주 가능성의 지역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겠다.
2022년 김해문화재단 김해예술인지원사업 ‘불가사리’ 사업설명회 Ⓒ 김해문화재단
내가 살고 있는 김해에서 사람 존중을 기본으로 관념과 방식을 바꾸려고 노력한 김해예술인 지원사업 <불가사리>와 전문가라는 꼬리표가 부끄럽지 않게 기획하여 거북이 알만큼 좋은 공연과 전시를 내놓으려는 기획사업 <거북이>, 지역과 지역을 훨훨 날아다니면서 좋은 콘텐츠를 교감하는 지역 간 교류사업 <봉황> 등으로 2023년 한 해를 지혜로운 토끼와 함께 보낼 예정이다. 마침 2차 문화진흥기본계획(안)의 비전을 보았는데 ‘모두를 위한, 모두에 의한 문화매력국가’라고 한다. ‘모두’는 누락됨이 없음을 뜻하니, 부디 그러할 것으로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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