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와 영이의 이야기로 시작하자. 초등학생 철이와 영이는 매달 같은 금액의 용돈을 탔다. 철이는 엄마한테 공책, 연필, 버스값을 매달 하나하나 따로따로 탄다. 철이의 삶은 그 용돈 하나하나에 한정되어 있다. 돈 쓰는 데에 있어 별로 생각은 안 해도 되지만, 세상일이 항상 그렇듯 특별한 상황(예를 들어 엄마 생일, 여자친구 선물 등)에는 난감하다. 그래도 부족한 것은 없이 정해진 ‘항목’ 안에서 ‘종속’되어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렇지만 철이는 도대체 자기의 ‘한 달 살이’에서 얼마나 용돈이 필요한 지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나아가 인상을 요구하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이제 영이의 이야기다. 영이 엄마는 한 달 필요한 만큼을 예상해서 일정 금액을 통으로 준다. 영이는 매달 초 용돈을 어떻게 쓸지 계획을 세우고 더 나아가 아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다른 것도 할 수 있다. 한 일 년 지나니 한 해를 평가하고 당당하게 용돈 인상을 합리적으로 엄마한테 요구한다. 게다가 이제는 필요한 것을 위해 새로운 수익구조를 고민하기까지 이르렀다.
누가 지역자치를 가로막는가?이제 지역문화를 돈으로 바라보자.
지역문화는 어찌 보면 철이의 상태이고, 내용에서 과정, 시작에서 결론까지 중앙정부라는 존재가 무겁게 자리하고 있는 형태이다. 지역문화사업은 2005년부터 지속적으로 지자체로 이양이 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국고보조의 비율이 매우 높다. 지역문화의 계획, 교부, 정산까지 중앙정부의 비중이 크다. 정보람¹에 의하면 “국고보조금은 특정 부처에 편중되어 있는데, 이 중 문화체육관광부는 23.3%(1조5,976억 원)를 지방자치단체에 국고보조금으로 이전하고 있어 총지출 대비 국고보조금 비율이 5번째로 높은 부처이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중략) 소액다건형이라는 점이다”라고 분석하고 있다. 즉 지역문화의 많은 부분이 국고보조의 소액다건 사업이 기본으로 짜인다는 것이다.
문화 분야는 지방자치단체가 계획을 세워서 추진해야 하는 사업 대부분이 현재 중앙정부에서 정해져서 재원이 보조금으로 지원되고, 이에 맞춰서 매칭으로 지방비가 투입된다. 나아가 문예진흥기금 등 기금 역시 중앙에서 대부분 틀을 맞춰서 지역으로 내려가게 된다. 이러니 지역 입법기관에서는 중앙의 예산이 반영되지 않는 자체적이고 창의적인 사업들에 대해서 오히려 ‘왜?’ ‘뭣 하러’ 등의 문제제기를 하기 일쑤인 실정이다.
이렇듯 철이와 마찬가지로 하나하나 자그마한 사업들이 중앙의 결정에 맞춰 집행되고 지역은 이것에 매여져 소위 ‘지역문화정책’이 돌아가고 있다. 그것을 요약해서 현재 지역문화의 문제를 보면 아래와 같다.
이러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 ‘지역 간의 문화격차를 해소하고 지역별로 특색 있는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킨다는’ 지역문화진흥법이 제정되었지만, 이 법에 명시된 지역문화진흥기본계획마저 문체부가 수립하고 그 기본계획을 받아서 지역에서는 ‘지역문화 시행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과 결과도 문체부에 제출해야 한다. 이 와중에 ‘도대체 지역에서는 종합적인 계획’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러한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서 완전 문화분권으로 가기 위한 길목에 중간 대안으로 ‘포괄보조 제도’가 거론된다. 포괄보조금은 보조금 중에서 개별 보조금이 아닌 교부조건을 포괄적으로 설정하는 제도이다. 개별 사업단위²로 수직계열로 관리되는 보조사업 운영의 비효율성과 경직성 쟁점에 대한 대안이다. 제대로 운영되면 유연한 사업 추진, 지방정부의 중장기적인 계획 수립 및 시행, 중복 가능성을 제거하는 재정적 순기능의 역할 등이 부각될 수 있다.
현재 문화 분야에서는 그나마 포괄보조 전 단계인 ‘통합지원’ 사업이 우선 시도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역문화생태계 구축 통합운영 시범사업’을 들 수 있는데 문화정책과, 지역문화정책과, 문화예술교육과 사업이 통합되었지만, 실제로는 이전 개별 부서, 기관의 지침, 회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무늬만 통합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사례로는 ‘생활문화사업 통합지원 사업’을 들 수 있다. 이 사업은 진일보한 측면이 있고 협력체계, 네트워크를 중시하면서 추진되었으나 역시 개별사업을 계획, 기획할 재량이 주어지지 않아 그 한계가 드러났다.
여기에서 농림부와 복지부의 사례를 볼 필요가 있다. 농림부³에서 포괄사업으로 2020년 시범 도입된 ‘농촌협약’ 사업이 있으며, 복지부의 ‘지역자율형 사회서비스투자사업’도 2013년부터 포괄보조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외에 ‘지역사회 통합건강증진사업’은 사업 영역 간 경계를 없애고 주민 중심으로 사업을 통합, 협력하여 수행하는 방식을 취한다.
문화 분야에도 포괄사업으로 추진되는 것이 있다. 사실 형식보다 내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데 바로 ‘법정문화도시 사업’이다. 물론 공모, 성과평가 등의 개별사업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내용과 목표는 지역문화분권으로 가는 정책이다. 내용과 형식의 간극은 현실에서 문화도시를 ‘사업’으로 보는 행정과, ‘정책’으로 추진되는 실무, 그리고 시민 사이에 바라보는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문화도시’ 사업의 미래를 본다면, 개별 도시의 문화적 발전을 넘어서 ‘문화분권’, ‘문화자치’의 시범 무대로서의 중요한 기반이며 시작인 ‘매우 큰 정책’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문화자치 시대, 산하기관·재단 리셋하자지역문화의 자치에 앞서 가장 많이 우려하는 이야기는 중앙정부, 즉 문체부 산하기관의 존립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사업을 수행하는 산하기관은 대부분 중간 행정역할에 그치고, 문체부의 역할을 보조해 주는 데 머무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후 산하기관의 역할은 교부나 정산 등 행정지원이 아니라 전문성을 살려서 컨설팅과 협력의 역할로 바뀔 수 있다.
지역문화를 통합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할 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에서 매우 큰 혼란을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할 때에 정책을 맞춰주는 지역문화 설계를 제대로 하는 역할이 막중해진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예산 택배업자 혹은 정산 기술자로서 산하기관이 아니라 전문적인 컨설턴트로서 기관이 새로 서게 되는 것이다. 그와 함께 지역문화재단(광역/기초)도 보조금, 지원금 수행기관에서 나아가 중앙과 지역의 정책 연계와 현실화를 위한 전문기관으로 지역의 문화계획을 통합적으로 짜는 역할이 확대될 것이다. 이러한 기관들이 향후 지역 문화자치의 반석이 될 것이다.
자립과 독립은 연습과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의지와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 안에서의 공감대이다. 이를 위한 실험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이 실험을 통해 공감대, 의지, 지혜, 경험이 축적되어 조만간 지역 문화분권의 날을 기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