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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문화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본 3.1운동

발행처 관리자
발행일 2019.03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민의의 광장, 도시가 촉발한 만세시위



도시가 촉발하고 농촌으로 번져가는 3.1운동의 만세시위 양상. 그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동학농민전쟁의 기억은 농촌 풍경을 배경으로 한다.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일대는 물론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등 중남부 지방의 농촌을 배경으로 활약했다. 이후로 농촌은 차츰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공간으로서 역할을 잃어갔다. 대중 시위와 집회, 그에 대한 기억은 이제 도시 공간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갔다. 1898년 독립협회가 문을 연 만민공동회야말로 도시의 비폭력 저항을 상징하는 시위이자 집회였다. 이러한 도시에서의 비폭력 투쟁을 상징하는 시위와 집회는 3.1운동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도시가 촉발하고 농촌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 3.1운동은 도시가 시위와 집회의 중심 공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근대화의 심장부인 서울의 시위는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되었다. 탑골공원은 망한 나라, 즉 대한제국 정부가 도시개량사업의 일환으로 시민들의 왕래가 번잡한 종로 거리에 조성한 근대적 시민공원이요 광장이었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삼창을 마친 시위대는 탑골공원을 나와 학생, 시민들과 함께 거리를 가득 메우면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도시에서는 시위 주체도 방식도 새롭고 다양했다. 무엇보다 근대 교육의 혜택을 받은 학생들이 실질적인 시위 주동 세력으로 부상했다. 학생 계층이 독립운동의 동력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인 것이다. 이들 학생들은 시위를 모의하는 한편, 등교를 거부하는 집단행동, 즉 동맹휴학으로 맞섰다. 노동자도 동맹파업으로 동참했다. 상인들이 상점 문을 닫았다. 무엇보다 도시에서 가장 낯선 풍경은 시위에 참가한 여학생이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민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일으켰다고 한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만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평양?진남포?안주(평안남도), 선천?의주(평안북도)? 원산(함경남도) 등 6개 도시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모두 북부지방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였다. 모두 철도역을 갖춘 도시로서 최남선이 작성한 <3.1독립선언서>를 전날 혹은 당일 날 전달받아 낭독했다. 첫날 7개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다음날부터 인근지역으로 확산되면서 두 달이 넘게 전국에서 일어났다. 3.1운동을 발화한 민의의 광장이 바로 도시였던 것이다.


‘지금 여기’ 시위 문화의 기원


조선총독부는 만세시위의 확산 원인을 ‘선동적 문서의 배부’에서 찾았다. 학교나 교회에 비치한 등사기로 등사한 각종 유인물과 격문, 그리고 지하신문 등은 3.1운동을 확산하는 촉매제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 뿌려진 〈조선독립신문〉의 영향으로 전국 곳곳에서 지하신문이 발간되었다. 지하신문은 만세시위 소식을 방방곡곡에 알려주는 배달부 역할을 했다. 지하신문과 함께 간단한 구호를 적은 전단?낙서?포스터, 시위계획이나 투쟁방침을 알리는 격문?사발통문, 관리의 사퇴나 일본인의 퇴거를 요구하는 경고문?협박문 등의 유인물들이 사람들을 거리로 이끌었다.


▲ 김정인 교수 강의 현장


3.1운동 당시 시위 현장에 태극기와 애국가가 등장했다. 시위 현장에는 다양한 깃발이 등장했는데, 태극기를 가장 많이 흔들었다. 태극기는 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제작했다. 학생 이외에도 여성 노동자, 기생, 농민, 청년 등 다양한 계층이 태극기를 만들었다. 시위현장에서만 태극기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면사무소에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걸기도 했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거는 마을이 등장했다. 만세시위에는 새로운 운동가도 등장했다. 대한제국이 망한 이후 숨죽이며 부르던 애국가도 만세시위에서는 당당하게 제창되었다. 3.1운동 과정을 거치면서 애국가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3.1운동을 통해 새로운 시위문화가 탄생하고 있었다. 지하신문과 각종 유인물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들은 만세시위를 추동했다. 시위대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나라 상실의 고통을 절감했고 독립 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민주주의와 비폭력 평화를 외치다.


3.1운동은 민주주의와 비폭력 평화의 정신이 빛난 독립운동이었다. 무엇보다 3.1운동은 민족마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은 정당한 권리이므로 마땅히 독립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른 저항운동이었다.〈2?8독립선언서〉는 일본의 식민 지배는 ‘무단전제이자 부정하고 불평등한 정치’라고 비판하면서 한국인에게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고, 종교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구속했으며 행정?사법?경찰 등 모든 통치기관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발표한 <조선독립선언서>는 일본을 민주주의의 공적이라 비판했다. 나아가 세계의 모든 민주주의자는 독립투쟁에 나선 ‘우리 편’이라고 선언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독립운동은 자유, 정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싸우는 민주주의 투쟁이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내용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반포한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미친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또한 3·1운동은 비폭력 평화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다. 3.1운동을 모의한 종교계는 <3.1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의 하나로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나 광명정대하게 하라’고 하여 비폭력의 원칙을 제시했다. 비폭력 평화의 정신을 상징하는 직접행동이 바로 만세시위였다. 3.1운동은 두 달 넘게 이어진 반일투쟁이었지만, 시위대에 의해 죽은 일본 민간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아가 3.1운동은 세계를 향해 한국의 독립 없이는 동양 평화도 세계 평화는 없다고 외쳤다. 당시 한국 독립이 곧 평화의 실현이라는 평화담론이 광범히 퍼져 있었다. 대한국민의회가 3월 20일에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동양의 평화는 한국의 자주 독립에 있다’라고 단언했다. <3.1독립선언서>도 2천만 한국인을 위력으로 구속한다면 ‘동양의 영구한 평화’는 보장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처럼 3.1운동으로 빛났던 민주주의?평화?비폭력의 정신은 이후 독립운동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1919년과 2019년을 이어주는 문화민주주의



우리는 단지 독립과 민주주의만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어느 민족이나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리이다. 우리는 무기를 든다든가 폭력을 써서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당한 요구는 거부될 수 없다.


3.1운동에 참여한 한 교사의 주장이다. 그것은 2016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촛불로 광장을 가득 채웠던 1700만 명의 외침이기도 했다. 네 달이 넘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와 광장을 촛불로 환히 비추며 평화로운 비폭력 시위문화를 이어간 경이로운 기록은 기념비적 사건이기도 하지만, 100년간 이어진 독립과 민주주의 문화의 역사가 응축된 대사건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역시 한반도 평화의 실현이다. 분단을 넘어 평화로 다가가는 길, 특히 남북의 이질적 정체성과 문화를 융합하는 과정은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 1919년과 2019년을 이어주는 문화민주주의의 전통은 한반도 평화의 길을 닦는데 있어 든든한 역사적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다.


필자소개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위원장 및 대통령직속 3.1운동및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기획소통분과위원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오늘과 마주한 3.1운동"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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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 2016년 10월 12일